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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읽다

일상순례자 (김기석, 2014년, 두란노)



길 위에 선 순례자의 고백은 아름다워라



신학교 시절과 십년 가까운 기자 시절을 겪으면서 나는 소위 말하는 긍정의 힘, 위로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쪽에 속하게 됐다. 물론 일했던 매체의 특성상 긍정의 메시지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에 동의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팍팍한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애초에 나는 영화 <미션>(1986년, 감독: 롤랑 조페)에서 화염 속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가브리엘 신부'보다는 함께 무기를 들고 일어선 '로드리고 맨도자'에게 더 공감하는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직면하지 않는 긍정과 위로는 도피처일 뿐이라는 것이 삶에서 체득한 진리였다. 그래서 나는 위로나 힐링의 정서를 깔고 만들어진 책을 정말 기피했다. 특히 이 거친 세상을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맨 몸으로 부딪히고 살아가야하는 가엾은 영혼들에게 "잘 될거야!", "믿음이 승리해!"라는 식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에세이나 설교집을 경멸했고, 단 한 줄의 글도 읽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예전에는 직장 상사였지만, 이제는 같은 직장에 머물지 않기도 했고, 한때 수많은 어려운 때를 지켜주고 지킴받았던 순간들이 있었으니 비록 호칭은 여전히 "팀장님"이라고 부르지만 만날 때마다 벗을 만나는 것과 같은 분이 만남을 끝맺을 무렵 새로 나온 책이라며 한 권의 책을 쥐어줬다. 바로 김기석 목사의 <일상순례자>였다. 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2008년 쯤이었나. 몇 년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여름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그의 작업실이자, 놀이터였던 3~4평 쯤 되 던 그 방은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두꺼운 그럴듯한 책장으로 가로 세로 규칙적으로 쟁여놓은 형세가 아니었다. 얇은 뼈대의 허름한 책장에 책들은 무수히 꽂혀 있었고 그것은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닿아있었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책 외에는 발 디딜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어서 그와 나는 마 주 앉을 수 없었다. 그는 저만치 멀리 앉아있었고 나는 그와 한참 떨어진 구석에 책과 책 사이에 억지로 만든 공간임이 분명한 조그 만 쇼파에 몸을 구겨놓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게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에 대한 첫 인상이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 진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울었다. 그의 글에서 목회자가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순례자의 여정이 느껴졌다. 그가 겪은 일상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담대히도 강대상 위에서 이렇게 살아라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함께 길 위에 선 순례자로서의 위로가 전해졌다. 서울, 엇비슷한 지역에서 스타 저자로, 청년 사역자로, 대형 교회 목회자로 이름을 날리던 한 목회자가 추문의 중심에 서는 동안 김기석 목사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만났고, 인생의 마이너리티에 속한 사람들 옆에 함께 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 제발리야 난민촌 주민들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희생된 두 살배기 어린 아이의 사진을 보고 태산보다 무거운 마음을 가졌던 그는 지금 팽목항에서 생떼같은 자식을 잃고도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받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p.22 봄의 사람을 기다린다) 한결같은 삶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p.62 야훼 라카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한결같은 긍정을 이야기하는 다른 이들과 같다. 그러나 종착지가 달랐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을 물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시대의 가장 작은 자는 어쩌면 생태계의 이웃들이 아닐까 한다. 상처 임은 것들과 연대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말할 수 없다. 크기의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살핌과 공경의 삶을 말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생태계 이웃과 연대라는 단어를 말하는 복음주의 목회자를 만난 것이 언제던가? 그래서 그는 "길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먼저 걸어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길이 생기는 것이다. (중략) 새벽이슬이 맺혀 있는 풀밭을 앞서 걸어가 길을 여는 이슬떨이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희망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희망은 진짜다. 달달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삶의 씁쓸함에서 나오는 진짜 희망이니 말이다. 

이 책을 만약 읽는다면 어설픈 희망이나, 위로 따위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사람, 진짜다!" 진짜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