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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보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리뷰:그 날, 아버지도 태어났다.


영화 _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 2013년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글 김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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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만난 아들에게 료타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그 때가 바로 료타가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사진=네이버 영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세상의 어떤 아버지도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친 후 그럴듯한 '아빠 자격증' 하나 턱하니 받아들고서야 아빠 노릇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2007년 1월 9일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은 화요일이었다. 날씨는 무척 맑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당시 주간 신문을 만들어내는 신문사에서 일하던 나는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은 햇병아리 기자였다. 당연히 신문의 마감일인 화요일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아내는 마감날이 되면 나를 아예 없는 사람인양 여기곤 했다. 기사를 마감하고, 신문 면을 편집하고, 인쇄소에 들러서 감리까지 본 후 집에 돌아오면 시간은 늘 자정이었고 그 날도 역시 그랬다. 


내 기억엔 11시 40분쯤 됐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털썩하고 쇼파에 앉자마자 그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던 아내가 나를 급히 불렀다. "양수가 터졌어"라는 말에 정신이 아득했다. 정기 검진을 위해 평소 다니던 병원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여 분.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아내는 주치의가 아닌 마침 분만실 앞을 지나가던 의사가 아기를 받을 정도로 급박하게 출산을 마쳤다. 분만실에서 처치를 마치고 난 후 아내는 병실로 올라갔고 나이 많은 간호사가 흰 천에 돌돌만 아기를 내게 안겼다. 예정된 개월에서 한달 반이나 채우지 못한 아이는 흰 천의 부피가 아니었다면 안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가벼웠다. 분만실에 있던 산모와 의사, 간호사 모두 떠나고 분만실 앞 차가운 형광등 아래 나와 내 첫 아이는 그렇게 단 둘이 남았고, 복도의 시곗바늘은 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아득했다. 인생의 폭풍같은 순간이 불과 두 시간 동안 일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첫 아이는 아기에서 아이가 되었고, 이젠 어른들의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듣고는 이해할 소녀로 자랐다. 돌돌만 흰천에 폭 싸여 있던 아기가 소녀로 자라는 동안 복도에 함께 서 있던 남자 어른도 중년이 되었고,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9년 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아버지의 반성문 쯤 되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났다.



6년의 시간 대신 핏줄을 선택하다

영화는 노노미야 료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30대 후반(아마도?)의 건설과 관련된 일을 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그에게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와 케이타라는 이름의 귀여운 아들이 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에 몰두해 사는 그는 사실 냉정한 성정의 사람이다. "요새 세상은 너무 착해도 손해보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그는 아들 케이타가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것에 내심 불만이다. 그러던 어느날 케이타를 출산한 병원에서 연락이 와 아이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가 료타의 아이와 바뀐 사람은 40대의 시골에서 작은 전파사를 꾸려가는 유다이라는 남자였다. 유다이는 아들의 이름을 류세이라고 지었다. 그러니까 케이타가 류세이가 됐고, 류세이가 케이타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병원 측의 주선으로 료타와 유다이의 가족은 매주 토요일마다 만남을 가지고 료타 부부는 류세이를 유다이의 부부는 케이타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주말마다 한 차례씩 케이타는 류세이의 집에서, 류세이는 케이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결국 케이타를 유다이의 집으로, 류세이는 료타의 집으로 원래 그랬어야할 각자의 자리로 원위치 시키기로 한다. 지난 6년의 시간이 아닌 핏줄을 선택한 것이다.

료타는 케이타를 류세이가 살던 집으로 돌려보내기 전 날, 아들 케이타에게 "이건 강해지기 위한 미션같은거야. 케이타가 강해져서 어른이 되어가기 위한 작전 같은거야"라는 변명을 말한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미션이 시작됐고,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했지만 항상 다정했던 아빠 유다이에 비해 새로운 아빠 료타는 건조했다. 빨대는 씹지 말고 먹어야 했고, 영어 공부는 매일 해야 했다. 아빠와 함께하는 목욕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고장난 장난감도 척척 고쳐내던 유다이 아빠와는 달리 료타 아빠는 귀찮은 표정으로 몇 번 만지작 대더니 새 걸로 사준단다.

결국 류세이는 엄마가 잠든 틈에 혼자 기차를 타고 옛날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료타와 류세이가 갈등을 겪는 동안 료타는 아들 케이타를 생각한다. 우연히 케이타가 찍던 카메라를 보던 중 자신이 나온 사진을 보게된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료타는 항상 잠들어 있었다. 케이타에게는 잠들어 있는 아빠가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스럽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돌아본 료타는 류세이와 함께 케이타가 있는 유다이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만난 케이타에게 "미안해"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무엇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만드는가?

이 영화는 대비의 연속이다. 우선 두 아빠, 료타와 유다이는 상반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유다이는 가난한 아빠다. 치매에 걸린 장인과 세 아이가 함께 앉은 밥상에서 조금만 딴 생각하면 만두는 한 조각도 구경할 수 없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말자"라는 유다이의 인생관이 그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스스로가 아이들의 장난감이 된다. 기력이 쇠할때까지 온 몸으로 놀아준다. 가족을 떠나 자신의 아들로 오게된 케이타가 불현듯 멍한 표정이 스쳐지나갈 때 아이의 눈 속에 담긴 슬픔을 읽고 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다. 비록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로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주는 것, 아버지라는 일도 아무나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반면 료타는 부족함이 없는 아빠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요한 환경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아빠다. 장래를 생각해 사립 유치원에 보낼 정도로 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라도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손이 굳는다며 아이가 받을 교육이라면 극성맞았다. 모든 점에서 유다이와는 반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료타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춘 것이었다. 아이가 생각하는 것, 케이타가 원하는 것에 눈맞춤하기 보다는 내 시선에 아이가 맞추가는 식이었다. 아이가 아닌 료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전제된 아버지의 관심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생에 정답이 없듯, 료타도 유다이도 정답을 가진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자격증이 없듯이 말이다. 이 영화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영화를 개봉한 이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나에게는 5살짜리 딸이 있다. (중략)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딸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 단지 딸이 내 피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아버지로서의 고민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고민의 답으로 영화에서는 군대군데 짧게 등장하는 컷에서 육체적인 핏줄이 아닌 함께 보낸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빨대를 꾸깃꾸깃 씹어대는 버릇을 가진 류세이와 같은 버릇을 가진 유다이의 컵을 비춰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결론은 아이와 아버지는 함께 태어난다는 것이다. 케이타는 6년 전 료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료타가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은 6년 후 케이타에서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어른이 아닌 아버지로서 실수를 고백하는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교감은 시작된다. 유다이가 늘 해왔던 아이와의 교감을 료타는 사과의 순간 처음 경험하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료타가 아버지로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 이미 아버지도 완성형이 되어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역시 실수의 반복을 통해 아버지스러움으로 자라가는 것이다.